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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꿈꾸는 기자 (발꿈기) - 45회 : 특집 라디오 다큐멘터리 <기미년 3월, 강원영동>

19-03-06 21: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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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 프롤로그
 
“4월 2일 장날을 기해가지고서 그 유도진흥회 동지 그저 한 여남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거 다하고 감리교회 청년회도 합세하고 장날을 기해가지고 하기로 했고~ / 총으로 가지고 진압을 시키고 그 주동자들은 잡혀갔죠~ / 양양의 3·1만세운동은 독립선언문이 유입이 되는 게 단초가 되는데 한 갈래는 유림의 이석범 선생이었고, 또 한 갈래는 조화벽 성도였는데~ / 삼척보통학교 출신 김순하라는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입수해서 신발 밑에 숨겨서 4월 15일 날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게 그 만세만 불러서 끝난 것이 아니고 사람이 희생이 됐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이어졌다. / 이 3·1운동의 자료가 이 정선지역에 굉장히 많이 없습니다. 많이 없기 때문에~ / 그럼 그럴수록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 떳떳한 얘기가 될 수 있는데 그래서 그 자료가 없는 것이 참 너무 억울해요. 진짜 참 너무 억울하다고요. /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줬으면 이런 고생을 안 할 것 아니냐? 12년 동안에 참 고생을 하고 이렇게 찾았는데~ / 사실 해방 이후에 또 6.25 끝난 이후에 최우선시 해야 될 걸 좀 소홀히 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 독립운동을 연구하다 보면 이게 사회주의 운동과 연관된 자들이 많고 그분들을 사회주의 운동가를 마치 항일투사로 우리가 부각을 시키면 빨갱이로 바로 타격받을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있을 것 같았고~ / 그 당시만 해도 이런 걸 한 사람들을 알기를 우습게 알았어요. 내가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리를 도저히 어디 가서 얘기할 수도 없었어요. 어디 가서 그런 걸 얘기해요.”
 
MBC강원영동 특별기획!
라디오 다큐멘터리 기미년 3, 강원영동
 
Chapter 1. 3·1운동 100주년
 
지난 3월 1일 강릉 월화거리에서 열렸던 3·1만세 재연 행사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도내 곳곳에선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렸는데요.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했습니다·. 강릉의 지역 극단 ‘해랑’의 김재현 대표의 말입니다.
 
김재현 극단 ‘해랑’ 대표 인터뷰
“월화거리 일대에서 강릉에서 열렸던 3·1 운동 만세 재연 행사를 퍼포먼스를 하게 됐습니다. 지역 예술인들이 모였을 때 예산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를 많이 했었는데요. 100년에 한 번 있는 행사니까 우리가 언제 또 해보겠느냐 그래서 다 같이 모여서 태극기도 그리면서, 영상도 같이 찍으면서 그런 퍼포먼스라든지 시나리오라든지 모든 기반이 되는 것들은 저희가 자발적으로 좋은 취지를 잡아서 하고 있습니다.”
 
<3·1절 노래>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들어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 지금 듣고 있는 이 노래는 3·1절 노랩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하며 부르고 들으셨을 겁니다. 벌써 올해가 삼일절 100주년입니다.
 
우린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의 이미지나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이미지 등을 떠올릴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강원영동 지역의 3·1운동에 대해선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안타까운 점은 영동지역의 3·1운동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료 자체가 부족한데다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았고, 정리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못했다는 겁니다.
 
Chapter 2. 3·1운동의 국내외 배경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조선은 빠르게 식민지화합니다. 헌병경찰제도,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적용하는 ‘조선태형령’, 일정 범위 내의 범죄는 정식 재판 없이 즉결할 수 있도록 한 ‘범죄즉결령’,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교육시키려는 ‘조선교육령’이 잇따라 시행됩니다. 3·1운동의 배경에 대해 강릉문화원 박도식 전임교수에게 들어봤습니다.
 
박도식 강릉문화원 전임교수 인터뷰
“1910년대 무단 통치가 시행되거든요. 그때 ‘태형령’ 행해지고 있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해서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토지 소유한 것이 인정됨으로써 우리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자 총독부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고조가 되고 있죠. 그런 와중에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죠. 원래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런 나라가 해당되는데 우린 해당사항이 없지만 그 영향을 상당히 받았습니다. 최초의 순수 학생운동이자 3·1운동을 촉발시킨 선구적인 운동이 2.8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간행하는 영자신문을 통해서 미국동포들의 독립운동 이런 것을 접하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기획하게 됩니다. 그게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각 언론사 이런 데 보내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되죠.”
 
Chapter 3. 3·1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 독립선언서의 의미와 배포
 
일본에서 벌어진 2.8 독립운동 이후 국내 지도자들은 서둘러 3·1운동을 기획하게 됩니다. 2월 20일부터 비밀리에 인쇄가 시작돼 모두 2만 1천 부가 만들어지고 후에 수 개월간 만세운동이 이어지면서 모두 3만 5천 부 가량이 제작됩니다. 당시 인쇄술의 수준을 생각하면 상당한 수치입니다.
 
독립선언서는 어떻게 배포됐을까요? 독립선언서를 서울 외, 어느 지역에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 중요했을 겁니다. 독립선언서가 제작된 게 2월 하순이기 때문에 거사일인 3월 1일까진 시간이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안도 매우 중요했을 겁니다. 따라서 빠르고,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철도’ 말고는 없었습니다.
 
강원도의 경우는 당시 함경도 원산으로 가는 철로가 주요 독립선언서 배포의 근거지가 됐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강릉이나 원주가 주요 거점이 되지 않고 왜 하필 원산이었을까요? 당시 독립선언서 배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과 도보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경원선의 종착점인 원산이 중심이 된 겁니다. 즉, 철도를 통해 빠르게 원산으로 보내며 중간에 평강을 통해 강원 영서지역으로 확산시킨 뒤 원산에선 북으론 함흥, 남으론 강원영동 지역으로 배부하려던 거였습니다. 김시명 순국선열유족회장의 설명입니다.
 
김시명 순국선열유족회장 인터뷰
“강원도 지역은 교통상으로 철도를 중심으로 해서 서울을 오거나 원산지역 이쪽으로 많이 다녔기 때문에 특히 강원도의 북쪽 지역은 상당 부분 북한의 치하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Chapter 4. 강원 영서지역의 만세운동
 
철도가 핵심 역할을 했다면 독립선언서를 일찍 확보한 영서 북부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시작되고 영동 남부지역은 많이 늦어야 하지만 실제로 강원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의 만세운동은 시기적으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건 3월 1일 대대적인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와 검문이 강화되며 독립선언문 배포 과정에 많은 지역의 지도자들이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김인성 기자의 뉴스 보도입니다.
 
김인성 기자 뉴스 보도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곧 강원도에도 확산됐습니다. 서울에서 원산으로 이어지는 경원선과 가까운 북부지역부터 시작돼, 실제 만세운동은 철원이 3월 9일로 가장 빠르고, 영동지역은 간성 3월 17일, 강릉 4월 2일, 양양 4월 4일, 삼척 4월 15일이었으며, 도내에선 영월이 4월 21일로 가장 늦게 벌어집니다.”
 
Chapter 5. 고성(간성)의 만세운동
 
지금의 고성은 1919년 3월 당시엔 간성군이었습니다. 경원선의 종착역인 원산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만세운동이 일찍 일어납니다. 김광섭 고성 향토사 연구위원의 말입니다.
 
김광섭 고성 향토사연구위원 인터뷰
“영동지역이 이 영서지역보다 3·1운동이 늦게 시작됐어요. 기미년하면~ 1919녀 3월 1일을 대한독립만세를 발발했다고 하는데 3월 17일이죠. 장날을 기점으로 했어요. 특히 고성의 독립운동사를 쓰면서 영동지역에선 최고 먼저 시발점이 간성지역이었다. 간성보통학교에서 시발이 돼서 장날 퍼졌다고 하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배나 웃대 사람들은 흔히 얘길 해요. 먹고 살기도 바빴다. 풀하고 나무껍질을 먹을 정도로 식량 부족이나 어렵다 보니까 독립이나 항쟁을 하기 위해선 역부족이지 않았나 그래서 사실 해방 이후, 6.25 끝난 이후 최우선시 해야 될 것을 좀 소홀히 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간성군의 3·1 만세운동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성군 향토사연구소 김광섭 위원이 고성문화원과 함께 지난해 ‘고성의 독립운동사’를 발간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독립운동사와 3·1 만세운동 관련 자료는 특히나 부족한 상황입니다. 도대체 왜 자료가 전혀 없었을까요? 이성식 고성군지 편찬위원의 말입니다.
 
- 이성식 고성군지 편찬위원 인터뷰
“북한 인민공화국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역사적인 정통성을 부정당한 의식이 지역민들에게 잠재돼 있지 않았을까. 이 지역 자체가 항일운동에 대해서 무지하고, 저조하고, 의식이 낮은 지역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발굴 작업이나 연구 작업이나 이런 것들이 진작 이뤄졌어야 되는데, 남한에서 워낙 반공의식이 강화된 상황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는 이런 작업에 의해서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연구하다 보면 이게 사회주의 운동과 연관된 분들이 많고 사회주의 운동가를 항일 투사로 부각시키면 빨갱이로 바로 타격받을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있을 것 같았고. 그런 부분과 빨갱이의 낙인의 두려움 속에서 이지역 사람들은 생활을 했었고, 좀 의식 있는 지식인들은 많이 억압되지 않았을까 그런 느낌을 받는 거죠.”
 
- 광복 이후 5년간 38선 이북에 위치한 곳들은 북한의 통치를 받게 되는데 이후 한국전쟁이 끝난 뒤엔 다시 남한에 속하게 됩니다. 게다가 이승만 정부의 제일의 통치 이념이 ‘반공’이었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폭압에 시달리다 해방을 맞았는데 얼마 뒤 전쟁이 나고, 갑자기 세상이 바뀐 거죠.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자칫 빨갱이로 몰려 집안 전체가 힘든 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알아도 모른 척, 있는 자료는 다 불사르고 없애는 암울한 시대를 겪어야 했던 겁니다. 이런 현대사의 비극은 결국 오늘날 고성지역의 독립운동 역사 그 자체를 지우는 아픔을 낳았습니다.
 
고성군은 영동지역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입니다. 그럼에도 200쪽이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을 한 권 냈을 뿐이고 3·1 만세운동 기념탑이나 비도 없습니다. 그런데 올해 기념탑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박행봉 고성군 자치행정과장 인터뷰
“저희가 예산을 편성했었는데 지난 연도에 국비를 1억 원을 더 확보해서 4억 원 규모의 상징탑을 조성할 계획에 있습니다, 올해. 장소 여건이 여의치 못해서 2018년도에 조성을 못 했습니다. 계속 고심하던 끝에 문화원 이사분들, 원로분들 중지를 모아서 신안 근린공원에 설치할 계획에 있습니다. 이것이 설치되면 군민들의 자긍심이라든가 후손들에 대한 나라 사랑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것 같습니다. 38 이북 지역이다보니 북한 쪽에 이런 자료가 많이 있을 것 같은데 향토자료연구사라든가 이런 분들을 활용해서 앞으로 독립운동사에 대한 자료들을 더 많이 챙겨서 독립운동하신 분들에 대한 넋을 기릴 수 있는 고증 자료를 만들어보도록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Chapter 6. 정선의 만세운동
 
박행봉 고성군 자치행정과장의 말이었습니다. 고성만큼이나 자료를 찾기 어려운 곳이 또 한 곳 있습니다. 바로 정선인데요. 정선은 성당이 만세운동 계획을 세우는데 핵심 역할을 합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지역 지도자들은 장날 전날인 4월 1일을 거사일로 잡습니다. 정선에선 지난 2012년 김영윤 향토사연구위원이 ‘정선의 3·1운동과 의병활동’이란 논문을 썼습니다. 김영윤 위원을 정선에서 만났습니다.
 
김영윤 정선 향토사연구위원 인터뷰
“여기는 정선 천주교 성당이고요. 1919년 3월 20일 정도에 독립선언문이 입수가 돼서 천도교인을 중심이 돼서 만세운동이 시작됩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제 일경에 발각이 되거나 그러면 모진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숨어서 이동했던 걸로 문헌상에 조금씩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1919년 4월 1일에 시작이 돼서 정선 시내 농협 앞으로 해서 현재 공설운동장 이쪽에서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합니다. 나전, 여량, 임계를 거쳐서 동해, 삼척으로 이동을 한 걸로 나오고 있습니다. 1919년 4월 1일에 시작된 이유는 정선지역의 시장 날짜가 2일 장날입니다. 그때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시장을 보러 왔기 때문에 사람을 모아서 하기가 좋았던 걸로 문헌상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지역별 1919년 항일운동 기록을 정리해 공개했는데 정선의 만세운동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기존 사료가 많이 부족하다는 뜻일 겁니다. 그럼, 강릉의 만세운동은 어땠을까요?
 
Chapter 7. 강릉의 만세운동
 
강릉에선 4월 2일에 첫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당시 두 갈래의 준비가 있었습니다. ‘강릉공립보통학교’의 김춘경 교사와 주동자 이명의가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기획하지만 같은 반 학생의 밀고로 무산됩니다. 최근중 광복회 강원영동북부지회장, 그리고 독립운동가 최영방 선생의 아들 최갑집 씨의 말입니다.
 
- 최근중 광복회 강원영동북부지회장 인터뷰
“독립선언문을 입수해서 강릉으로 돌아와 다시 유도진흥회 동지들과 만세운동을 계획했죠. 여기에 감리교회에 있는 안경록 목사와 교회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도 인쇄하고 임당동에 일번지 상가 있죠. 그 자리가 감리교회 자리예요. 유도진흥회 주역들이 여남은 사람이 모여서 감리교회 청년회도 합세하고 4월 2일 장날을 기해서 했고. 초당동 창동회라는 모임이 4월 4일을 보 수축 공사를 하는 날로 정해서 지금 택시부광장 거기가 장터니까 거기까지 오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러니까 모인 장소에 도달해서 선창부와 후창부, 해산방지부 이렇게까지 조직을 완전히 해서 작업하던 괭이와 쇠스랑, 가래 이런 걸 그대로 들고서 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시작했죠.”
 
최갑집 / 최영방 선생 아들
“ 초당사람만 다섯 사람이 체포됐어요. 단지 낮에 시장 와서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고 일하다가 지게 짊어지고 지게 벗어놓고 만세를 부른 거죠. 앞에서 부르다보니 체포가 된 거죠.”
 
강릉 경포호수 부근에 3·1만세운동 기념탑이 있습니다. 이곳엔 기념탑과 3·1독립선언서 전문, 그리고 강릉의 4월 2일과 4일 만세운동으로 일제로부터 처벌을 받은 열 분의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곳을 그냥 주차장으로만 여기고 심지어 기념탑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는 모습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최영방 선생의 아들 최갑집 씨의 이야깁니다.
 
최갑집 / 故최영방 선생 아들
“어려움이야 많았죠. 많지만 그렇다고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하고. 그때 먹을 게 없으면 부잣집 가서 쌀을 좀 내다가 먹고 또 가을에 농사지어서 갚고. 지금 젊은 세대들은 그래요. 젊은 세대들은 몰라요. 독립운동이 어떻다는 것을 아직 잘 모르고 있고. 관련 책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책이 나와서 사방에 책이 비치가 됐을 적에 젊은 사람들이 이해하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오면 여기서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많아요. 여기 앉아서. ‘이봐요. 여긴 놀이터가 아니고. 이런 중한 데서 앉아서 담배 피우면 어떡하냐?’ 제가 이렇게 얘기도 하고 그럽니다만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모릅니다. 너무나 허무하죠. 허무합니다. 그럴수록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 떳떳한 얘기가 될 수 있는데 얘기만 듣고 얘길 하다 보니까 떳떳하지 못해요. 자료가 없는 것이 너무 억울해요. 억울하다고요. ”
 
Chapter 8. 양양의 만세운동
 
양양의 3·1 만세운동은 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격렬했으며, 가장 많은 피해를 남겨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독립운동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양양도 역시 독립선언서가 지역 안으로 유입되는 두 갈래를 통해 만세운동이 계획됩니다. 가슴 아픈, 이날의 역사에 대해 양양 향토사연구소 이철수 소장과 양양문화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철수 양양 향토사연구소장 인터뷰
“지역의 유림 대표인 이석범 선생께서 고종 인산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서 돌아왔어요. 그게 3월 20일경인데. 4월 4일부터 각 마을에서 대표들이 인솔해서 태극기를 만들어서 양양시장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하고. 오후에 경찰서에 와서 죄 없는 사람들 왜 잡아갔느냐 항의 중에 가평리에 있는 구장을 하는 함홍기란 분이 화로를 들고 경찰서장한테 던졌는데 옆에 있던 순사 둘이 칼을 뽑아서 목을 치고, 팔을 치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4월 9일날 현북면 거기서 기사문리라고 38선 있는 주재소에 가는데 일본 경찰과 헌병은 무기를 가지고 딱 기다리다가 조준 사격을 한 거죠. 하조대 고개 거기 기념비가 있는데 거길 내려가는데 거기에 아래서 숨어서 지도자들을 쏜 거죠. 그 자리에서 9명이 사망했어요. 희생자도 제일 많고”
 
또 한 갈래는 양양감리교회를 축으로 한 기독교계의 준비였습니다. 당시 개성 호수돈 여학교 학생이던 조화벽이 만세운동 뒤 독립선언서를 버선에 숨겨 양양으로 들어와 양양교회 김필선에게 전달해 양양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됩니다. 조화벽은 유관순 열사의 시누이입니다. 양양군은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화벽 여사를 재조명하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4월쯤 여성 독립운동가 조화벽의 삶과 독립운동 현황을 기록한 책을 발간할 예정입니다. 김양식 양양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의 이야깁니다.
 
김양식 양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인터뷰
“양양 만세운동을 이 책 한 권으로 다 볼 수 있는 필독서가 되는 만세운동사를 한번 만들어보자. 이래서 6명의 연구원들이 매일 모여서 3·1 운동에 관한 자료 수집, 사진 이런 걸 수집해서 양양군에서 올해 4월 4일 양양 장날에 만세운동을 재현할 때 저희는 준비했던 책자를 군민들한테 배포하려고 합니다, 무료로. 독립선언문이 유입되는 경로가 단초가 됐는데 한 갈래는 유림의 이석범 선생이었고, 또 한 갈래는 조화벽 성도였는데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원산을 거쳐서 배로 대포항으로 들어오는데 버선목에 몰래 숨겨왔다는 거예요. 개성 호수돈학교로 발령이 나서 근무 중에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 선생과 결혼을 하게 돼요.”
 
Chapter 9. 삼척의 만세운동
 
- 삼척은 서쪽으론 백두대간에 가로막혔고, 북쪽으론 원산과 거리가 멀어 영동지역에선 가장 늦은 4월 15일에서야 첫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삼척보통학교에서 전교생 176명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헌병이 출동하면서 만세운동은 외부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나고, 주동자 4명이 체포됐습니다. 삼척초등학교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당시 만세운동 현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심영곤 삼척 4.15 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의 말입니다.
 
심영곤 삼척 4.15 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인터뷰
“그때 당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꽃처럼 번질 때 삼척보통학교도 3·1운동에 호응해서 4월 15일 교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당시 삼척보통학교 출신 김순하라는 학생이 재경유학생 중에 있는데 독립선언서를 입수해서 신발 밑에 숨겨서 재학생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면서 4월 15일에 독립 만세운동이 펼쳐지게 됐습니다. 기념사업회에선 매년 마다 노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고, 앞으로도 100주년을 기념해서 저희들이 부족한 사료를 더 많이 모집해서 좋은 책자를 마련해서 후세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삼척지역 3·1만세 운동은 1920년대 이후 대대적인 항일농민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이상 광복회 강원영동남부지회장의 말입니다.
 
- 이상 광복회 강원영동남부지회장 인터뷰
“삼척 중앙국민학교에서 발생이 되어 가지고 학생들이 전부 주동이 되어가지고 수백 명이지 그 학생들이지 전체가 3·1절이면 행사를 하고 있고, 또 한 가지 뭐냐면 임원리 이런 데는 어떤 운동을 했냐면. 일정 때 측량할 때 반대를 해서 항일운동을 했어요. 그런 사항이 있는 거고, 북평에선 그전에서 독립운동을 좀 했는데. 구명운동도 있었는데 그건 흔적이 없어요, 행사도 안 하고 묻지도 않고, 단지 뭐냐면 3·1절 행사하는 건 두 군데에서 행사를 하고 있고요. 장날에 이어가지고 군중을 모아가지고 반대시위를 해서 지서고 면사무소고 박아대고 이랬어요. 헌병대가 와서 진압을 시키고 거기서 주동자들은 잡혀갔죠. 그때 아버지가 주동자가 됐죠.”
 
Chapter10. 강원도의 독립유공자
 
광복 이후 38선 이북 지역은 북한이, 이남 지역은 남한이 각각 통치하죠.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누가 독립유공자고 친일파인지 가려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영동지역의 경우 특히,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려 집안이 몰락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독립운동은 자랑이 아닌 숨겨야 할 비밀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부의 독립유공자 인정과 서훈 기준도 일제로부터 받은 처벌과 옥살이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함흥에 법원과 형무소가 있던 영동지역은 그마저도 증거를 대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강릉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들도 뒤늦게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신문기사가 세상에 알려지며 자격을 갖추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분들과 그 가족들은 독립유공자로 제대로 인정받거나 대우받지 못한 채 억울한 삶을 살았거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중 광복회 강원영동 북부지회장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얼마나 어려운지 그 과정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 최근중 광복회 강원영동북부지회장 인터뷰
“얘기만 들었지 어떤 자료를 찾지 못했어요. 원호청에서 유공자로 인정된다 이런 얘기가 있더라고 그래서 맞다. 그럼 나도 찾아봐야겠다. 그걸 위주로 수소문을 하다 보니 자료를 모아서 원호청에 신청했더니, 한 1년 지나서 회신이 오기를 이것만 가지고 자료가 미비하다. 더 자료를 보완해서 자료를 제출해 달라 회신이 왔더라고요. 기관이나 법원 같은데 이런 데 다 알아봤더니 여기는 강원도는 함흥지방 관할이기 때문에 없다. 막연하게 더 찾아보라는 얘기만 하더라고요. 십몇 년 지났죠. 그렇게 찾아다녀도 찾을 재간이 없어 마지막에 난 이제 포기할고 말 테니까 당신네들이 알아서 하시오. 더 이상 찾지 못하겠다. 난 이북 가서 어떻게 찾냐 그랬더니 마지막으로 한군데만 더 가주십시오. 그때 당시 신문을 찾아보라고 이거야~ 아니 1919년도 신문을 어디 가서 찾느냐 말이야. 이랬더니 국립도서관에 가면 있습니다. 이러더라고요. 한 30분 있으니까 있습니다 이러더라고요. 정말 만세를 부르고 싶더라고요.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줬으면 이렇게 고생을 안 했을 거 아니냐 12년 동안 고생을 하고 이렇게 찾았는데 결과는 그거 하나 찾는 거였다. 그걸 가지고 보훈청에 가져갔더니 됐다 이거야”
 
강원도엔 독립유공자가 몇 분 있을까요? 강원도엔 전체의 4.1%인 623분 있습니다. 도내에선 양양이 가장 많고, 홍천, 철원 순입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도 진행이 되고 있지만, 공적을 찾고 인정받아 정부가 훈장이나 포장 수여자로 확정했는데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들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는 일도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 이영자 사무관의 말입니다.
 
이영자 국가보훈처 사무관 인터뷰
“국가보훈처에서는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는 분들을 독립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는 15,180명이며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서 훈장을 전수하지 못한 분은 5,700여 명입니다. 그래서 독립유공자 제적원부 현지 조사, 국내외 홍보 등을 통해서 후손 찾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는 독립유공자 후손을 한 분이라도 더 찾아 예우 및 지원을 함으로써 나라를 위해 희생, 공헌하신 분들께 국가의 책임을 다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Chapter 11. 옛 신문에서 찾은 영동지방의 만세운동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엔 도내 곳곳의 ‘만세운동’ 관련 기사와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강릉을 비롯해 상당수 독립유공자들이 그 기사를 통해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요. 조선총독부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신문의 도움을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는 상황은 생각할수록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1919년 4월 14일자엔 ‘강릉소요자판결’ ‘본월 2일 시장을 이용한 국기를 배포하고 만세를 부른 주모자 여섯 사람은 예심을 마치고 공판에 부처서 선고를 받았는데 최선재, 조대현은 징역 열 달에, 최선근은 동 여섯 달에, 최돈옥, 김진숙은 동 넉 달에 처하였더라.’ 이런 기사가 실렸고요. 4월 18일자엔 ‘각지 소요’ ‘본월 4일 강릉면 각동 농군이 남대천 관수개천을 치고 도라가는 길에 만세를 부르고 소요한 주모자 육인은 십일에 판결 언도를 마친 바 최진규, 최이집은 징역 4개월, 또, 최영방, 박장실, 김봉공은 태(형) 구십으로 언도하였으며 유옥일은 기소유예가 되었더라’
 
  1. 월 13일자엔 ‘양양 시장에 대소동’ ‘본월 4일은 양양읍시장일인데 오후 1시경부터 군중 수천인이 소요하던 중 경관과 수비병은 진력하야 제지하엿스나 끝나지 않고 불온한 상태가 있는 고로 부득이 발포하야 사상자 삼명이요, 중경상자가 다수인데 주모자 수십 인을 체포하엿더라’
 
  1. 월 3일자엔 ‘간성의 소요자 징역 열 달에 처함’이란 제목으로 ‘강원도 간성군 신북면 계월리 김동원은 지나간 삼월 중 소요 때에 면서기 박규용과 공모하고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사용하야 독립선언서 같은 선동서류를 등사하야 근처 게시판에 게시하고 또는 각 민가에 배부한 일로 두 사람이 모두 체포되야 원산지청에서 심리 중이더바 김동원은 징역 열 달의 선고를 받았다더라’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Chapter 12. 기록, 수집, 정리 서둘러야
 
3·1 만세운동이 도내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는데도 관련 자료가 부족한 원인은 광복 직후 남북 분단 상황이 만들어진 게 큽니다. 특히 이 같은 이념 대립은 결국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는 상황을 빚어냈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정확히 정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데요. 이와 관련해 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의 말입니다.
 
김시명 순국선열유족회장 인터뷰
“현재 남한 지역에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경향들이 상당히 있을 겁니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당연히 묻혀 있는 기록들이 나타나겠지만 현재 그것을 찾아보는 일은 그 당시에 있었던 분들의 증언 그 부분을 찾거나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 3·1운동하고 연계된 일을 찾아서 그쪽의 3·1운동을 증명해나가는 그런 일을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영동지역에는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유공자 본인은 생존자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2세대도 대부분 80~90대로 연로한 상황이죠. 이젠 3세대도 70~80대 노인들입니다. 그만큼 관련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듣고, 기록해두고, 정리하는 일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겁니다. 광복회에서 이런 일을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분들이 90을 앞둔 노인이어서 이분들이 기력이 있을 때 지역에서, 주변에서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이상 광복회 강원영동 남부지회장과 김영윤 정선 향토사 연구위원의 말입니다.
 
이상 광복회 강원영동남부지회장 인터뷰
  • 운동 때 피해 보셨던 분들의 후손들이 동해, 삼척, 태백에 몇 분이나 생존해 계세요?
  • 하나도 없죠. 다 돌아가셨죠. 지금 독립운동가 살아 있는 건 강릉에 한 사람이 3년 전에 돌아가셨죠. 독립유공자 당신이.”
그럼 그 후손들은요?
  • 후손들은 많죠.”
  • , 삼척, 태백에는 몇 분이나 계세요?
  • 약 60명 된다고 얘기했잖아요. 수권자는 16명이 이제 보상을 받는 거고. 다달이.”
그분들 기억이 잊히기 전에 빨리빨리 자료를 챙겨놔야되겠네요?
  • 네, 네, 해야죠.”
 
김영윤 정선 향토사연구위원 인터뷰
“이 3·1운동 자료가 이 정선지역에 굉장히 많이 없습니다. 많이 없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냉대, 홀대하지 말고 옛날 선조들이 어떻게 활동했다는 3·1운동서부터 시작해서 의병활동까지 다 같이 공부를 해서~”
 
한국전쟁 이후 친일파들이 득세한 남한보다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우대했던 북한에 어쩌면 항일운동 자료가 더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북 관계가 개선돼 남북한이 서로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파악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면 남북 강원도의 항일독립운동사는 재평가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Chapter 13. 영동지역의 항일 정신 되새겨야
 
영동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점과 당시 일을 증언해주실 독립유공자들의 이미 돌아가셨거나 연로하시다는 점,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상황입니다. 기억에만 의존하는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게 마련이죠.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3·1운동은 어떤 의미일까요?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만세 함성과 휘날리는 태극기를 떠올리면 영동지역도 전국 어느 곳에서도 똑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무섭고 불안했지만, 힘을 모아 불의와 억압에 도전하고 저항한 기미년 3월, 그날의 시대정신은 여전히 100년이 지났지만,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MBC강원영동 특별기획! 라디오 다큐멘터리 “기미년 3월, 강원영동”
 
기획 장진원,
취재·연출 김인성,
구성·해설 김성춘
뉴미디어제작 박채원